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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 : 희극과 비극의 경계로 탄생한 인물을 다룬 영화

by 동그란수디 2025. 10. 4.

영화 조커 포스터

 

영화 조커(Joker, 2019) 는 DC 코믹스 세계관 속 악당의 탄생기를 다루지만, 단순한 슈퍼히어로 장르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불평등, 인간의 고립, 심리적 붕괴를 치밀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희극 배우를 꿈꾸던 아서 플렉은 현실에서 철저히 무시당하고 배제되며, 결국 광기의 상징인 ‘조커’로 변모합니다. 이 글에서는 영화 줄거리와 캐릭터 변화를 중심으로 희극과 비극이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심층 분석해보겠습니다.

희극 배우를 꿈꾸던 아서의 현실

아서 플렉은 뉴욕을 닮은 도시 고담시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광대입니다. 그는 거리에서 광고판을 들고 서거나 병원에서 아이들을 웃겨주는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합니다. 하지만 아서의 진짜 꿈은 스탠드업 코미디언입니다. 무대 위에 서서 사람들을 웃기고, 인정받으며 행복해지는 것이 그의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잔혹합니다. 아서는 신경학적 질환으로 인해 상황과 상관없이 억지 웃음을 터뜨리는 증상을 갖고 있습니다. 웃음은 원래 행복과 즐거움의 상징이어야 하지만, 아서에게 웃음은 사회적 고립과 오해의 원인이 됩니다. 대중교통이나 거리에서 터져 나오는 그의 웃음은 불편함과 비웃음을 불러일으키며,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 채 ‘괴짜’로 낙인찍습니다.

그의 삶은 점점 더 고립되어 갑니다. 어머니와 좁은 아파트에서 함께 살며, 어머니가 과거에 고담시 시장 후보 토머스 웨인과 인연이 있었다는 믿음을 좇는 모습은 희망이라기보다는 집착에 가깝습니다. 아서는 어머니를 돌보며 살아가지만, 정작 자신이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심리 상담을 받던 사회 복지 제도마저 예산 삭감으로 끊기며 그는 약조차 구할 수 없게 됩니다.

희극을 꿈꾸지만, 현실은 비극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대비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이자, 희극과 비극의 경계가 얼마나 모호한지를 보여줍니다.

광기와 폭력으로의 전환점

아서의 인생을 바꿔 놓은 장면은 지하철 총격 사건입니다. 광대 분장을 한 채 퇴근하던 그는 부유한 청년 세 명에게 괴롭힘을 당합니다. 그동안 당해온 폭력과 모멸이 한순간에 폭발하듯, 아서는 권총으로 그들을 살해합니다. 이 사건은 그의 내면에서 억눌린 분노를 해방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사건 이후 아서가 느낀 감정입니다. 그는 두려움이 아닌 해방감과 쾌감을 경험합니다. “드디어 누군가가 나를 무시하지 않았다”는 왜곡된 자존감을 느끼며, 아서는 폭력을 통해 존재감을 확인합니다. 지하철 사건은 고담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광대 가면’은 사회 불평등에 맞선 저항의 상징으로 번집니다. 아서는 원치 않게 사회적 혁명의 아이콘이 되어버리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개인으로서의 아서가 아닌, 상징으로서의 조커에 점점 몰입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자신이 존경하던 TV 토크쇼 진행자 머레이 프랭클린의 쇼에 초대됩니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머레이와 관객은 아서를 웃음거리로 소비합니다. 희극 무대는 아서가 꿈꾸던 자리였지만, 그는 그곳에서도 존중받지 못합니다. 결국 아서는 생방송 중 머레이를 총으로 쏘며, 조커로서의 존재를 확립합니다. 이 장면은 희극의 무대가 순식간에 비극의 무대로 전환되는 순간으로, 영화의 상징적 정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희극과 비극이 만나는 조커의 탄생

영화 후반부, 아서는 더 이상 개인적인 꿈이나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군중의 폭동 속에서 새로운 상징으로 떠오릅니다. 경찰차에 실려 가던 아서는 추종자들에 의해 구출되고, 피투성이 얼굴로 군중 앞에 선 그는 무대 위 배우처럼 조커의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이때 그는 아서 플렉이 아니라, ‘조커’라는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인물로 재탄생합니다.

조커의 탄생은 단순한 범죄자의 등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적 고립, 경제적 불평등, 무관심 속에서 길러진 괴물의 탄생이자, 현대 사회의 어두운 자화상입니다. 아서가 원했던 것은 단순히 웃음과 인정이었지만, 사회가 그에게 준 것은 조롱과 배제뿐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희극을 꿈꾸다 비극의 아이콘이 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비극은 사회적 희극처럼 대중에게 소비됩니다.

희극과 비극의 경계는 이처럼 모호합니다. 웃음은 행복의 상징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타인을 조롱하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비극은 개인의 몰락으로 보이지만, 집단의 눈에는 새로운 희극적 볼거리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영화 조커는 바로 그 경계선을 시각적으로, 서사적으로 보여주며 관객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영화 조커는 슈퍼히어로 장르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현대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과 개인의 고립이 만들어낸 비극적 초상화입니다. 아서 플렉은 희극 배우를 꿈꿨지만, 사회적 배제 속에서 결국 조커로 변모했습니다. 그는 희극과 비극 사이에서 끝내 비극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대중은 그 비극을 또 다른 희극으로 소비합니다.

이 영화가 강렬한 이유는 단순히 한 악당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사는 현실을 정면으로 비추기 때문입니다. 웃음과 눈물이, 희극과 비극이, 인정과 조롱이 얼마나 가까운 곳에 공존하는지를 보여주는 조커는 지금도 여전히 사회적 메시지와 예술적 가치로 회자되는 작품입니다.